2010년 3월 19일 금요일

타는 목마름으로...시인 김지하(金芝河)

http://blog.naver.com/neo99k/140000471082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1982) 연보 김지하 (본성명, 김영일 金英一, 1941- 필명 김형 金灐) 1941년 전남 목포 생, 1959년 서울대 미학과 입학, 1966년 졸업 1964년 대일 굴욕 외교 반대투쟁에 가담. 첫 투옥 이후 1980년 출옥 때까지 투옥, 재투옥을 거듭하여 장장 8여년 동안 영어(囹圄)의 세월을 보냄. ( <오적> 필화사건 등 ) 1963년 첫 시 <저녁 이야기>를 발표한 이후, <황톳길> 계열의 초기 민중 서정시와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판소리 가락에 실어 통렬하게 비판한 특유의 장시(長詩) <오적(五賊)> 계열의 시들, <빈 산>, <밤나라> 등의 빼어난 70년대의 서정시들, 그리고 80년대의 '생명'에의 외경(畏敬)과 그 실천적 일치를 꿈꾸는 아름답고 도저한 '생명'의 시편들을 만들어 냈다. 1975년에는 '로터스(LOTUS) 특별상'을 수상. 첫시집 [황토(黃土)](1970), [타는 목마름으로](1982), [애린]1·2(1986),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대설(大說) [남(南](1982, 1984, 1985) 등의 시집과 '생명사상'을 설파한 산문선집 [생명](1992) 등이 있다. 1995년 9월 17일자 일간지에 김지하 시인은 고통과 수난, 압작의 상징이었던 과거의 '지하'란 이름을 버리고 '김형'이라는 필명(筆名)을 사용한다고 하며, 새롭게 태어난 모습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밝혔다. 1941년 전라남도 목포 출생 金芝河 論 ― `1974년 1월'을 中心으로 ―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김지하, `1974년 1월' 앞부분> 1974년 1월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얘기는 72년 10월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선포된 유신은 박정희 개인에게는 영구집권을 위한 법적 보장이 되었겠지만, 국민들에게 그것은 정치적 질곡의 심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은 73년 가을부터 본격화했으며 그해 12월24일 발족된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는 그 집약적 표현이었다. 74년 1월8일 오후 5시를 기해 발효된 긴급조치 제1호는 이 같은 유신반대 움직임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그러니까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그 개정을 제안하는 행위, 나아가 그같은 비판과 제안을 보도하는 등의 행위까지를 중범죄로 취급해 법관의 영장 없이 구속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긴급조치는 공포통치 시대의 막을 열었다. 김지하(55)씨의 시 `1974년 1월'은 긴급조치의 발동과 더불어 잠적한 시인이 강릉에 도망가 있으면서 구상한 것이다.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겁먹은 얼굴/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설악산 백담사 근처 암자를 거쳐 강릉으로 내려온 시인은 옥천동 오거리의 `경북집'이라는 옥호를 단 집에서 오징어회에 소주를 마셨다. 방광이 부풀어 변소에 다녀오던 시인은 문득 벽에 걸린 깨진 거울을 들여다본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에는 핏발이 선 초췌한 몰골의 사내가 마주 보았다. 섬뜩했다. 거울에 비친 시인의 모습은 양면적이다. 그는 시대와 대결하는 투사인 동시에 지치고 나약한 여느 필부(匹夫)의 면모도 내비친다. `불퇴진의 민주투사 김지하'의 신화는 시인 자신에 의해 벗겨진다. “겁이 없어서 목숨을 내놓고 싸운 것은 아니었다. 겁내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추스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는 시인의 말은 그의 싸움을 오히려 더욱 숭고하고 값진 것으로 만든다. 시대와 불화한 데 따른 시인의 수난과 그에 대한 문학적 대응은 대체로 박정희의 통치기와 겹친다. 그는 64년 6월3일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해 처음으로 4개월간의 감옥 체험을 한 이래 60, 70년대를 거치면서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한 싸움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70년대란 박정희와 김지하의 대결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물론, 70년대가유독 문인들의 참여와 행동이 두드러진 시대이긴 했지만, 지하는 단연 그 뜨거운 상징이었다. “황톳길에 선연한/핏자욱 핏자욱 따라/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었고/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두 손엔 철삿줄/뜨거운 해가/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은 곳/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황톳길' 첫연).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타는 목마름으로' 첫연). `황톳길' 등의 초기시에서 유혈과 죽음의 역사가 현재에 대해 지니는 의미를 전통 율격에 얹어 노래했던 시인은 싸움의 절정기에 쓴 `타는 목마름으로'와 같은 시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구를 각혈하듯 내뱉는다. 두 시 모두에서 핵심적인 어휘로 등장하는 동사 `타다'는 그의 시세계의 강렬함을 말해줌이다. 현실이 어둡고 싸움이 버겁기로서니 마냥 도망만 다닐 수는 없는 법. 역시 강릉에서 쓴 시 `바다에서'는 수난과 고통의 현장으로 회귀하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한치뿐인 땅/한치도 못될 이 가난한 여미에 묶여/돌아가겠다 벗들/굵은 손목 저 아픈 노동으로 패인 주름살/사슬이 아닌 사슬이 아닌/너희들의 얼굴로 아픔 속으로/돌아가겠다 벗들….” 그래서 돌아왔다. 장남의 출생도 지켜보지 못하고 도피행각을 벌이던 시인은 대흑산도에서 체포되고, 민청학련사건 관련 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현 정권은 무너지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그 재판정에서의 진술이었다.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를 구출하기 위한 운동이 일본과 미국, 유럽 등 해외에서까지 불거져나온 탓인지, 그는 구속된 지 10개월 만인 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다.“종신형을 받았는데 벌써 나오다니 세월이 미쳤든지 내가 미쳤든지, 아니면 둘 다 미쳤든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그의 출옥 일성이었다그러나 그는 완전히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광고탄압이 한창이던 <동아일보>에 연재한 `고행―1974'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밝힌 혐의로 3월13일 다시 체포되고 형집행정지처분이 취소된다. 그 사이에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이 있었다. 김지하씨는 여전히 옥 안에 있으면서 박정희의 암살 소식을 듣는다. 그날은 옥 안에서 시작한 참선이 꼭 1백일째를 맞은 날이었다. “참선 덕분에 퍽 가라앉은 상태에서 방송을 들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무상하다는 것이었다.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잘 가시오. 나도 뒤따라 가리다.'” `투사 김지하'가 `생명사상가'로 변신한 것이 박정희의 죽음을 전후한 무렵이었다. 옥방 창틀에 싹을 틔운 민들레를 보고서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에 눈을 떴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시인 자신은 단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인 흐름이라고 설명하지만, 투사 김지하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이들에게 그같은 변모는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저항에서 생명으로'라고 요약할 수 있을 그 변모가 표나게 드러난 계기는 지난 91년의 이른바 `분신정국'이었다. 젊은이들의 잇따른 분신을 거칠게 질타한 시인의 글이 어떤 신문에 실렸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지하의 변절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생명운동가 김지하와, 투사 김지하를 사랑했던 이들 사이의 오해와 갈등은 양쪽 모두를 상처입혔다. 그 어느쪽이 의도한 바도 아니었다. 그때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지금 한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시인의 의도가 생때 같은 목숨들의 스러짐에 대한 안타까움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 무렵 시인이 발표한 시 `척분(滌焚)'을 다시 읽어보자. “스물이면/혹/나 또한 잘못 갔으리/가 뉘우쳤으리/품안에 와 있으라/옛 휘파람 불어주리니/모란 위 사경(四更)/첫이슬 받으라/수이/삼도천(三途川) 건너라.” 태그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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